[통역으로 통하는 세상번역은 반역이라니…통·번역사는 반역자가 아니라 애국자 아닐까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나라군요. 남녀가 함께 식사하지 않을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몇 년 전 함께 일했던 동갑내기 유럽인 의뢰인이 한 말이었다. 통역사 18명이 투입된 프로젝트였다. 전우애를 다지는 즐거운 점심시간, 여성 통역사들이 다 같이 나가는 걸 본 모양이었다. 원래 통·번역 업계가 여초 상태다. 그렇지만 일본 문화를 좋아해서 이웃나라인 한국 프로젝트에 자원했다던 그는 마치 다 알겠다는 양 의기양양하게 한국을 진단했다.


말린체의 동상. 에스파냐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통역사인 그는 정복자에게 협력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번화가에서 본 서울 여성들이 천편일률적으로 피부를 하얗게 칠하는 화장을 한다며우리 백인을 맹목적으로 따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시아 여성들은 그들 고유의 미가 있다고 말했던 미국인 여성 의뢰인도 있었다. 그에게한국에서는 백인을 본 적도 없던 수백년 전부터 (밖에서 험한 일을 하지 않는 고귀한 신분을 드러내는) 백옥 같은 피부가 미의 기준이었다고 길게 설명해 줬다.


‘Translators, traitors!’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통상번역은 반역이라는 말로 번역한다. 이 말은 원래 이탈리아 속담에서 유래했는데 원어인 이탈리아어로도 ‘traduttore, traditore(발음이 트라두토레, 트라디토레에 가깝다)!’라 하니, 신기하게도 세 개 언어에서 모두 운()이 들어맞아 입에 잘 붙는다. 문화적 격차로 인해 완벽한 번역, 또는 통역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지만 이 말이 비유가 아닌, 세상이 통역사 직업을 바라보는 시각 그 자체로 느껴질 때가 있다.

실제로도 근대에 다른 이들보다 앞서 외국 문물과 언어를 접하고 통역사로 활동했던 역사적 인물들은 친일·친미주의자로 변질되기도 했다. 에스파냐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통역사였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최초로 혼혈 메스티소를 낳은 말린체 또한 멕시코 메스티소의 어머니이자 에스파냐 정복자에게 협력하며 나라를 망하게 한 악녀로 평가가 엇갈린다.


필자도 영어를 쓰는 직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외국 물 좀 먹어본, 외국을 추종할 것이 뻔한 사람으로 오해받곤 한다. 오히려 반대다. 일의 현장에서, 아직까지 우리나라가 잘 알려진 나라가 아니구나 하는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것도 고스란히 통역사의 몫이다. K, K뷰티가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지만 아직도동아시아 = 중국+일본공식이 남아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설연휴를 앞두고 업무 일정을 조율하는 회의에 통역으로 들어가서, ‘Chinese New Year’(중국 설, 중국에서는 춘절이라 한다)라는 표현을 쓰는 영어권 고객에게 ‘Lunar New Year’(음력설)라고 통역해주기를 계속했더니 회의 후생각해보니 한국에서도 설연휴를 쇠니 음력설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겠다. 부주의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온 일도 있다.

첫 글자를 소문자로 쓴 보통명사로서의 china자기(瓷器)’를 뜻하는 영어 단어이고 japan은 칠기를 뜻하는데 코리아라는 단어는 없다는 점도 사뭇 섭섭하다. 그만큼 한국을 대표할 만한 상품이나 이미지가 없었던 것일까.

 

외국 의뢰인에게 한국의 문화를 보여주고, 알리기 위해 소소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꽤나 즐거우면서 자긍심을 심어준다. 친한 한불통역사 중에 통역을 갈 때엔 한글 프린트가 된 스카프를 선호하고, 국산 브랜드 가방과 스마트폰만 사용하는 분이 있다. 의뢰인이 혹시나 궁금해하면 한국에 대해 설명해 주기 좋아서 어색함을 깨기 위한 대화(ice-breaking) 소재로도 좋고, 매일같이 외국인을 만나서 일하는 게 한국을 알릴 기회라는 생각에서 그러는 거라고 한다.


한국에 대한 편견에 부딪히고 맞서며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통·번역사들, 반역자가 아니라 애국자 아닐까.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1111651005&code=960100#csidxae9a68b960eef7f8cc4dd73033a4bf8